У нас вы можете посмотреть бесплатно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 총성.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 광복절 특집 - 코레아 우라! 대한국인 안중근 | KBS 20090815 방송 или скачать в максимальном доступном качестве, которое было загружено на ютуб. Для скачивания выберите вариант из формы ниж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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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절 특집 - 코레아 우라! 대한국인 안중근 안중근 의거가 올해로 100주년이 되었지만 안중근에 대한 국내 연구 작업은 턱없이 부족해 기초자료의 정리조차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민들은 그를 항일 영웅 가운데 한명 정도로 인식하고 있을 뿐 안중근의 애국적 생애와 숭고한 사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더 불멸의 애국혼으로 확고히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인데 일본에서만 해도 안중근의 유묵을 받았던 순 형무소 간수들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안중근의 사상을 연구하고 그의 큰 뜻을 기리는 모임이 활발하다. 이에 광복절을 맞아 안중근의 업적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 신흥 강국 일본은 서른 한 살 조선 청년의 죽음을 왜 이리도 기뻐했을까? 1910년 3월 26일 오후 5시, 중국 뤼순의 고등법원장 관사에 일제 관원들이 모여들었다. 바둑을 두고, 담소를 나눈 이들은 배우들이 펼친 공연을 관람했다. 샤미센을 반주로 춤과 노래를 풀어놓는 일본 전통 공연에는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다고 당시 만주일일신문은 전했다. 술잔이 오고간 만찬까지 5시간 넘게 이어진 연회는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이 주관했다. 참석자들은 마나베 지방법원장,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형무소장, 요시다 경시, 소노기 통역, 카미다 변호사 등 18명이다. 이날 오전, 이들은 조선인 1명을 사형시켰다. 감옥 한 켠의 교수대에서 생을 마감한 조선인의 이름은 ‘안중근’, 만주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일제 관동도독부는 안중근을 사형시킨 공로를 치하해 이들에게 상여금도 지급했다. 중국과 러시아를 차례로 격파한 당시 신흥 강국 일본은 서른 한 살 조선 청년의 죽음을 왜 이리도 기뻐했을까? ■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하얼빈 역 중국 흑룡강성의 성도 하얼빈 시, 중심가에는 유럽식 건물이 즐비하다. 쑹화강가 조그만 어촌 마을 하얼빈은 19세기말 제정 러시아가 건설한 동청철도의 기지가 되면서 국제적인 도시로 탈바꿈했다. 100년 전인 1909년 10월, 이곳에서 세 남자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진다. 만주 지역에서 일본과 이권을 다투던 제정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쵸프, 그는 극동지역에 일본의 침략음모가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자신들이 건설한 동청철도를 이용해 현장 조사에 나선다. 이 소식을 들은 일본의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는 까꼬프쵸프와 협의를 위해 일제가 건설한 남만철도를 이용해 하얼빈으로 향한다. 안중근은 이들보다 나흘 앞서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의 도착을 기다리며 안중근이 머문 곳은 동포 김성백의 집, 안중근은 이곳에서 하얼빈 공원까지 삼림가란 거리를 오가며 거사 계획을 짰다. 이발을 하고 거사 동지 우덕순, 유동하와 함께 생애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사진을 찍었다. 지난 백년 동안 하얼빈은 인구가 5만에서 400만 명으로 늘었다. 러시아가 건설한 동청철도는 중국 동북지역의 주요 교통수단이 됐다. 중국 정부는 4년 전, 안중근 의거의 현장인 하얼빈 역 구내를 새롭게 단장했다. 바닥을 깨끗이 포장한 다음에 안중근이 총을 쏜 자리에는 총격 방향을 알 수 있도록 세모 표시를 했다. 그리고 맞은 편,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진 자리엔 네모로 표시해 구분을 했다. 안중근과 이토의 거리는 불과 10걸음, 7m 정도. 100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두 사람은 이 자리에 섰다. 한민족의 영웅이지만 일본에겐 조선의 흉악범인 안중근, 조선 침략의 원흉이지만 일본에겐 근대화의 아버지인 이토, 이렇게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두 사람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에 대해 안중근은 거사 뒤 쓴 자서전에 이렇게 밝혔다. “멀리 조그만 늙은이가 러시아 관리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웃 나라를 강제로 빼앗고 사람의 목숨을 참혹하게 해치는 자는 저렇게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데 죄 없고 어질고 약한 민족은 어찌하여 이처럼 곤경에 빠져야 하는가? 이렇게 분한 생각에 3천길 지옥불이 머릿속으로 치솟아 올랐다.“ ※ 이 영상은 2009년 8월 15일 방영된 [광복절 특집 - 코레아 우라! 대한국인 안중근]입니다. #안중근 #하얼빈 #광복절 ✔KBS 다큐멘터리 | KBS 공식 유튜브 채널 [KBS 다큐] 🔔구독👍좋아요➡️ / @kbsdocumentary 📝문의: [email protected] Copyright ⓒ KBS. All rights reserved. Unauthorized reproduction, redistribution, and use (including AI training) are prohibit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이용(AI 학습 포함)을 금지합니다. ∙방송 시점에 따라 현 상황과 내용이 다소 다를 수 있습니다. ∙비방, 악성 댓글은 출연자 보호를 위해 운영자가 삭제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