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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5월13일 도산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운동단체 흥사단을 설립했다. 이 방송은 2013년 흥사단 설립 100주년을 맞아 도산 안창호의 생애와 업적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 자기 혁신의 길을 떠나다 미국 LA 근교, 리버사이드. 시청 앞 광장에 간디, 마틴 루터 킹과 함께 도산 안창호의 동상이 서있다. 100여 년 전, ‘안도산 공화국’으로 불렸던 이곳에서 미 대륙 한인타운의 역사가 시작된다. 1902년, 24세 청년 안창호는 서울 제중원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다음날 부인과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그 때 사용한 집조(오늘날의 여권)를 보면, 평양에 사는 안창호가 제물포항을 경유해 미국의 ‘화성돈(워싱턴)’까지 여행을 허락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즉, 안창호의 최종 목적지는 워싱턴이었던 것이다. 그는 결혼도 미루고 싶어할 만큼 유학의 꿈이 대단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미국에 도착한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하게 된다. 자신의 학업보다 동포들의 생활 개선이 더 시급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당시 보따리를 싸가지고 이곳저곳 농장을 돌아다니며 임금 노동을 하는 한인들을 ‘매트리스’ 노동자로 부를 정도로 그들의 생활은 피폐했다. 안창호는 한인 친목회를 조직하고 직업 알선과 함께 한인 교육에 힘쓴다. ‘나 하나를 혁명하는 것이 우리 민족을 혁명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독립의 자격’을 갖춘 족으로 거듭날 것을 강조한다. 1905년 4월,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 퍼시픽가에 사무실을 얻고 정치단체를 조직한다. ‘공립(共立)협회’다. 그 해 첫 아들을 얻은 안창호는 이름을 ‘필립(必立)’으로 짓는다. 민족이 반드시 일서서야 한다는 신념에서였다. ◼︎ 새 국민(新民)으로 새 국가(新國) 건설을 꿈꾸다 1907년 2월, 안창호는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귀국 후, 안창호는 대한매일신보사, 상동청년회, 서북지역 유력 인사들과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한다. 신민회는 ‘새로운 국민’을 주인으로 하는 ‘새로운 나라’,곧 자유문명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이 터지자 일제는 평양 대성학교에서 도산을 체포한다. 안창호를 비롯한 신민회 동지들이 배후 물로 지목된 것이다. 더이상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안창호는 망명을 선택한다. ◼︎ 해외 독립운동기지, 이상촌을 개척하다 안창호가 망명길에 오른 그 해,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한일병합을 강행한다. 국내를 탈출한 안창호는 만주와 러시아 일대 답사에 나선다. 한인 사회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독립운동 기지 개척을 위해서였다. 중국 흑룡강성 봉밀산 십리와 지역. 안창호가 개척한 조선인 마을이 있던 곳이다. 미주 한인들은 독립운동 기지 개척을 위해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그 자금을 봉밀산 개척에 투자한다. 이렇게 개척된 봉밀산에 3곳의 한인 마을이 형성되어 총 500호 정도가 삶의 터전을 꾸렸다. 봉밀산 개척 사업은 안창호가 진행한 이상촌 운동의 첫 출발이었다. ◼︎ 독립운동을 위한 한인 네트워크를 조직하다 1912년 11월 20일, 대한인국민회는 해외 망명정부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선포한다. 시베리아를 포함한 5개의 지방총회와 산하 각 지방회를 거느린 해외 한인의 최고 기관이자 ‘무형정부’로 발돋움할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중앙총회장에 선출된 안창호는 해외의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엮어내기 위한 조직적인 네트워크 사업을 펼친다. 세계 한인들을 조국 독립이란 목표 아래 결집시키기 위해서였다. 고된 노동에서 오는 육체적 고통보다 잃어버린 조국에서 오는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고, 일본인이 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던 초기 이주 한인들은 대한인국민회를 통해 단결했다. 그리고 국권회복과 민족운동에 필요한 자금 지원을 담당한다. 1919년 3월 9일, 3.1 만세운동 소식을 들은 안창호는 마침내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시기가 왔다고 판단하고,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선정되어 중앙총회에서 모금한 6천 달러를 가지고 상해로 출발한다. KBS 흥사단 100주년 특집다큐 – 영원한 청년 도산 안창호 1편, 자기로부터의 혁명(2013.5.11.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