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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미 - 야래향(夜來香) (1944)

노래 이야기 중화권에서 긴 시간동안 가장 많이 불렸을 법한 노래.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름인 등려군(鄧麗君, Teresa Teng)의 노래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야래향(夜來香)'은 사실 1944년 일본인 가수 이향란(李香蘭)에 의해 처음 발표되었습니다. 일본가수의 이름이 이향란이라는 것에 의아해 하실수도 있지만, 사실 그녀는 1920년 중국의 봉천성에서 일본인 부모 슬하에서 태어난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라는 인물입니다. 이향란의 일생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우선 '히키아게샤(引揚者)'라는 단어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 같은데요. 우리가 흔히 쓰는 '인양(引揚)'이라는 말은 어떤 것을 끌어서 높은 곳으로 옮긴다는 뜻이지만 사실 '히키아게샤'는 2차대전이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온 민간인을 일컫는 말입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제국주의를 표방하며 많은 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하기 시작한 일본은 내부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국민들을 식민지로 이민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만주국, 한국, 사할린, 대만과 북/남 아메리카 등을 포함해 1945년 패전할 당시의 이민자 수가 230만명에 달했다고 하네요. 전쟁이 끝나면서 하루아침에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전락한 히키아게샤들은 어떻게든 살아서 고향 땅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굳이 귀국, 귀향 등의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히키아게샤라는 표현을 썼던 이유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험난했기 때문인데, 패전과 동시에 일본 정부는 그 기능을 상실했고 이에 대다수의 민간인들은 자력으로 복귀해야 했답니다. 그나마 한국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대부분 무사히 빠져나갔지만 일제의 만행에 괴로워하던 식민국가의 국민들은 그들을 곱게 돌아가게 둘리가 만무했고 특히나 소련군에게 잡히는 경우에는 목숨을 잃게 되는 경우도 빈번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히키아게샤'들 중에서도 이향란의 경우는 조금 특별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녀는 중국에서 태어난 일본인의 신분으로 살며 서구적인 외모와 출중한 노래실력으로 일찌감치 연예계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법적인 양자가 아니라도 대부가 자신의 성을 따 이름을 지어주던 중국의 풍습에 따라 어렸을 적 아버지와 의형제였던 심양은행의 총재 이제춘(李際春)의 양녀로서 이향란(李香蘭)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데요. '향란'이라는 이름은 실제로 이제춘이 필명으로 사용하던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중학 시절 심양을 떠나 북경으로 간 이향란은 반숙화(潘淑華)라는 이름을 썼는데, 이는 그녀의 또 다른 의부인 당시 천진시장이었던 반육계(潘毓桂)에게서 받은 이름으로 북평익교여중에서 중고교 수업을 받고 연예계에 데뷔할 때까지 '반숙화'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됩니다. 1930년대 말부터 배우이자 가수로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하고 일본, 만주 뿐만 아니라 조선에까지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됩니다. 그녀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는 극장을 '7바퀴 반'을 둘러 줄을 서야한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했지요. 1943년에는 만주와 중국 영화사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만세류방(萬世流芳)'이라는 영화에서 주연을 맡으며 중국 전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대스타로 우뚝서게 됩니다. 유명세를 달리는 이 여배우는 일본이 만든 '만주영화협회'의 눈에 띄게 되고, 군국주의를 미화하고 만주국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게 되면서 많은 중국인들의 미움을 사게 됩니다. 1945년 일본의 패전 후 이향란은 중국정부로부터 한간(漢奸)의 죄로 구속되며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 닥칩니다. 한간이라고 하면 매국노 또는 반역자 정도의 죄라고 생각할 수 있겠네요. 그녀는 죽음의 문턱 앞에서 일본호적을 제시하고 일본인임을 증명하며, 가까스로 중국에서 추방을 당해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후 1958년 연예계를 은퇴할 때까지 일본과 홍콩 심지어는 헐리우드에까지 진출해서 왕성한 활동을 했지요. 1969년에는 방송 사회자로, 또 1974년에는 일본의 국회의원 3선까지 지낼 정도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2014년 9월 7일. 94세의 나이로 사망한 후에도 그녀의 일생에 대한 여러 영화와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습니다. "那南風吹來淸凉 那夜鶯啼聲凄愴 남풍이 시원하게 불어오고 밤 꾀꼬리는 구슬피 웁니다 月下的花兒都入夢 只有那夜來香 吐露着芬芳 달 아래 꽃들은 모두 잠이 들었는데 오직 야래향만은 향기를 내뿜고 있네요 我愛這夜色茫茫 也愛那夜鶯歌唱 나는 아득한 밤의 어둠을 사랑하고 밤 꾀꼬리의 노래도 좋아하지만 更愛那花一般的夢 抱着夜來香 吻着夜來香 야래향을 품에 안고 꽃잎에 입맞춤하는 꽃같은 꿈을 더욱 사랑합니다 夜來香 我爲你歌唱 夜來香 我爲你思量 야래향 나 그대를 위해 노래해요 야래향 나 그대를 생각해요 阿阿阿 我爲你歌唱 我爲你思量 아아아 그대를 위해 노래해요 난 그대를 생각해요 夜來香 夜來香 夜來香 야래향 야래향 야래향"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이할 무렵에 한국에 들어온 꽃이라서 '해방초'라고도 부르는 야래향. 한자로 표기할 때 '월견초(月見草)'라고 적기도 한답니다. 겨우내 무슨 꽃인지 알지 못하게 바닥에 붙어 지내다가 한여름이 되면 흔하게 볼 수 있는 들꽃중 하나입니다.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노랫말이 늘 귓가에 맴도는 노래지요. 아직까지도 많은 가수들에 의해 불려지고 있고 저 또한 지금 방영되고 있는 KBS 드라마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 OST 이전에도 이 곡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노래에는 국경이 없다고들 하지요. 작고하신 대만 가수 등려군이 등소평과 함께 중국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두 명의 등(鄧)씨라고 불리우는 것처럼 오늘 주현미TV를 통해 처음 소개하는 외국곡 '야래향'을 국경과 이념을 떠나 편한 마음으로 함께 감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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